16일(월) 연세대학교 대강당, 종합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반도의 희망"이란 주제로 통일분과 서울대회가 열렸다. 한국교회 8.15 대성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 연대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는 평화통일 기원예배와 평화통일 특강 및 대담이 열리며, 영역별 워크샵과 부흥회가 진행됐다. 다음은 영역별 워크샵에서 발표 된 허호익 교수(대전신학대학교, 조직신학)의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 원칙적 반공주의와 체험적 반공주의의 극복을 중심으로" 전문이다.

hhe.jpg머리말

일제 말기에는 많은 지도층들이 ‘일제로부터 독립은 환상’이라고 보고 서슴지 않고 친일을 하였으나, 선각자들은 독립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듯이 한국 교회도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통일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은 가까이 오는 것이며, 통일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독립과 해방’이 완수되는 것이다. 통일이야 말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시대의 사명이요 역사적 과업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분단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도적인 통일운동과 통일담론을 제시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적 발언으로 인해 기독교가 반통일적인 세력으로 비판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한국교회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반공이념이며, 반공을 주장하는 토대는 공산주의는 무신론이며 반종교적이라는 역사적 체험에 근거해 있다. 물론 초기의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모두 무신론을 주장하였고, 초기의 공산혁명 과정에서 무자비한 종교 탄압을 자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시대가 종식 된 후 공산국가인 러시아, 중국 뿐 아니라 북한도 종교정책이 급변하였다는 사실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무신론을 주장한 사상적 배경을 분석해보면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무신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한다.

기독교는 자체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좌우로 갈라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원칙적 반공주의와 체험적 반공주의를 극복하고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제3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안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반공 이데올로기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유난히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역사적인 원인이 있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해방직후만 해도 북한교회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사회민주당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 공산 독재 체제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기독교 박해 정책 아래서 한국기독교인이 겪은 체험과 6 ? 25사변을 통해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에 가한 적대의식의 체험”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반공주의 일변도로 경직하여 버렸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매몰시키고만 것이다.

김양선은 해방 후 한국교회가 반공사상을 보급 확립한 것이 교회사에 남을 제일 중요한 “교회의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고 유물론이며, 반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공산주의는 폭력혁명과 독재를 하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며 세계를 '뢰옥화'하기 때문에 공산당이 지배하면 한국은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 해방직후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배격한 논리적 배경이라고 한다.

당시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사탄으로 비유하고 미국 혹은 자유진영을 십자군으로 비유하였다.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사회민주당’을 설립하고 그 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월남하였던 한경직은 1949년 공산주의를 붉은 용이요 괴물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반공주의는 기독교 전체가 냉전체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흡인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매개체가 된 것이다.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좌익분자가 우익수용소에 침투하기 위해 이용했던 방법은 독실한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것이며, 북진 당시 “국군이 기독교 신자라면 무조건 관대히 봐 주었기 때문에 평양 거리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증언은 기독교인과 반공주의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여파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통치체계가 강화되어 갔고, 반제 ? 반미 이데올로기가 북한 주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반면에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빌미로 군부의 지위상승을 가져왔고 5 ? 16 이후 정치권력의 담당자가 되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한의 주민들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남북 간의 이데올로기 경쟁이 강화되면서 남북한 양쪽 모두에서 지배세력에 도전하는 사회 ? 정치세력을 체계적으로 차단하였다. 남한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처형하였고, 북한은 박헌영 등 남로당 간부들을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하고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시켰다.

이러한 냉전의 구조 속에 편입된 한국교회 역시 반공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제4차 총회(1968. 7. 4.-20, 웁살라)가 중공의 유엔 가입과 미국의 월남 전쟁 개입 반대한 것이 알려지자 WCC가 용공적이라는 주장과 함께 “한국교회의 반공적인 의사를 대내외에 선포하고 세계교회에 한국교회의 결의를 제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대의 “도시산업선교”에 관한 논쟁에서도 용공시비가 재현되어 도시산업선교 때문에 회사가 ‘도산’한다는 소문과 함께 산업선교 활동을 탄압하였다.

7. 4공동선언(1972)이 명시적으로 ‘사상 ? 이념 ? 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을 통일을 위한 3대원칙으로 반공주의와 북진통일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정권 안보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용공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주최한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관한 심포지엄’(1981. 7. 9)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 만행의 책임을 따지기 위해 저지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 3. 18) 이후 반미는 그 자체가 용공이거나 좌경으로 매도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해방신학의 용공시비와 관련하여 신앙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KNCC)는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88선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개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 고백을 통해 한국교회는 적대적 반공주의와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반공주의에 대한 이러한 결별선언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좌파세력이 한국교회의 핵심부를 장악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총 단결하여 1989년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출범시켰고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첨예화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적어도 한국 개신교의 한 축에서 반공주의가 무너져 내렸다. 개신교 반공주의는 이제 보수 그룹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것이 88선언에 대한 평가이다.

2001년 7-8월에 걸쳐 '월간조선'에서 개신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5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서, “김정일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50.9%(29명)가 “사탄의 제자이다”는 항목에 동의하였고,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적이다”는 항목에 67.9%(36명)가 동의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해방 후 “지나친 반공 기독교의 입장에서 북한을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는 등 남북분단과 갈등의 심화에 한몫했다”는 이유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한국기독교신학선언’(2000년 11월)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79.8%(42명)에 달했다. 북한의 지도자는 사탄이고 북한은 여전이 기독교의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반공적 기독교가 남북 갈등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기독교 지도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출현 이후 2003년 1월부터 친미 반공주의로 무장한 개신교 보수 세력들은 ‘반북 친미를 표방한 대규모 정치적 집회’를 10차례나 열어 자신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표출시켜 남한 기독교 내의 이념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기독교 진보세력들이 민주화를 위한 목요기도회를 모인 것을 ‘기도회 정치’(prayer meeting politics)라고 비판하던 기독교 보수 세력들이 본격적인 ‘친미 반북 정치 집회’를 주도하고 나선 것이다.

그 여파로 우익세력들이 결집한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2005년 6월 30일 김진홍 목사가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다. 이들은 한국이 좌파에 의해 총제적 위기에 처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거 좌파 사상에 경도 되었던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 가치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었는데도, 반 시장, 반 기업, 부에 대한 혐오와 결과적 평등, 반미 친북 등 시대착오적인 좌파 가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을 편향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6년 6월 말에는 뉴라이트 전국엽합 내 ‘기독교 뉴라이트’까지 결성되어 개신교 보수 세력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고 있다. 뉴라이트의 등장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을 비롯한 보수적인 목사들은 더욱 큰 목소리를 내고 그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표출하기도 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2007. 10 .4)을 실제로 반대하는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2007년 9월 21일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북한과의 평화는 환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주민을 흉악의 결박에서 풀어주고 핵무기를 폐기한다는 신뢰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추상적 평화선언을 하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강인철은 지난 약 15년간 한국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보수와 진보의 수렴이 아니라,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 확장”이라고 분석하였다.

북핵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2003년 이후 한국교회는 통일문제에서 오히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 중의 일부는 툭하면 반핵과 반북과 반 김정일을 이슈로 서울시청 앞에서 정치 색깔이 짙은 대중 집회를 때로는 기독교 단독으로, 때로는 극우보수 단체와 어울려서 개최했다. 이런 사태로 인해 그동안 보수와 진보 세력의 갈등은 더욱 심화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반통일적인 정서를 조장하는 데에 일부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목사들의 설교와 활동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도 과격한 반통일적인 설교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는 2007년 5월 19일 오후 3시 강남금식기도원(원장 김성광 목사)에서 행한 설교를 통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사탄이다. 원수와 사탄은 다르다. 김일성 부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목사는 착각한 거다. 반성경적 생각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돌려놓을 방법이 없다. 사탄처럼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북한과 남한의 차이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했다.

한홍구 교수는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들의 친미 반북 성향의 정치 집회를 예로 들며 “대형교회가 반북한, 반통일, 반평화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런 교회가 어떻게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나”고 반문하며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김근상 신부는 “교회의 형제들이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하는 게 부끄럽다”며 한 교수의 의견에 동감을 표하면서도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설득해 내는 게 또 하나의 교회의 역할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교회 내부에서 통일에 관한 입장의 차이를 어떻게 좁히는가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을 선도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북한기독교연맹과의 줄기찬 대화를 시도한 공이 크지만 이제는 남한 내의 이념 갈등 해소와 반통일 세력에 대한 대책에도 관심과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으로 본다.

공산주의의 무신론과 종교 비판의 배경

반공이념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공산주의의 본질이 무신론이며 공산국가의 종교탄압의 역사를 보아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이다. 공산주의가 무신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지도자는 사탄이요 공산주의 국가는 원칙적으로 반기독교적이라는 주장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모택동, 김일성을 비롯한 모든 위대한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로 알려졌다. 그래서 무신론은 공산주의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단지 무신론으로 타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무신론을 주장하고 종교 소멸론에 입각하여 종교 비판에 앞장섰는지 그 이론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검증을 통해 이념적인 편견을 조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혹시 그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맥거번(A. F. McGovern)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무신론을 주장한 역사적 조건들을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가 무신론을 주장한 네 가지 근거들을 제시하고 무신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주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1) 휴머니즘적 무신론

포이에르바하의 휴머니즘적 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1845)이라는 저서를 통해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진정한 인본주의로 찬양하며, “무신론은 종교의 말소를 통해서 자체와 매개되는 인본주의이며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말소를 통해서 자체와 매개되는 인본주의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무신론과 공산주의가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당시의 서양 기독교의 상황을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당시 프러시아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신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자신을 신임해 줄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종교는 권위에 대한 예속의 복종의 도구라고 믿게 된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유냐 신에 대한 예속이냐”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예속하는 기독교와 휴머니즘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 역시 기독교야 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서 하나님의 인간화를 제시한다. 구약성서의 출애급 사건을 인간 해방의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가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공산주의의 역사적 진행 과정을 보면 그들이 처음에 주장한 본래의 이념과 달리 현실 상황에서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이름으로 인간을 예속시키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적지 않게 자행한 것이 사실이다.

한 때 한  종교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던 칼  바르트는 “나는 이제 사회주의는 인간의 비참함과 그 인간을 돕는 일에 성서만큼 진지하고 심오하게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종교사회주의를 내 던졌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적 인간소외를 극복한다고 하면서 그와 동시에 오히려 인간의 자기 초월을 제거하였으며, 이것이냐 말로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소외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방시키는 이웃 사랑의 차기 초월로 이끌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종교가 마르크스주의의 참된 미래”이므로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되어 고통에 처한 인간을 돕는 일에 가장 진지하고 심오하여 참된 휴머니즘을 실현한다면, 종교가 휴머니즘에 반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한 근거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2) 이데올로기적 무신론

마르크스는 인간 해방의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종교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반대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고 왜곡된 종교적 위안을 주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비판 입문'(1844)에서 종교가 현실적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거나 현실적 고통에 대한 참다운 항거를 포기할 경우 종교는 ‘인민의 아편’(das Opium des Volkes)이 된다는 저 유명한 아편론을 주장한 것이다.

"종교적 고통은 동시에 현실적 고통의 표현임에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부정(항거)이기도 하다. 종교는 억압받는 존재의 한숨이며(영혼이 부재한 세계 속의 영혼처럼) 사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현재 상태를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사회변화를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본 것이다. 물론 기독교가 지배계급과 결탁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체념과 복종을 설교하기도 하였다. 대중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종교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고 이데올로기적 무신론을 정당화시키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몰트만은 마르크스가 종교를 “현실적 고통의 표현임에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항거”라고 규정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몰트만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종교가 자신의 본래적인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면 종교는 더 이상의 민중의 아편으로 비난 받을 이유와 근거가 사라진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야 말로 ‘현실적 고난의 표상과 고난에의 항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비판적인 종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참다운 항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고난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진정한 기독교야 말로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자유의 누룩’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정치 비판적인 종교라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가 아니라 로마 식민지의 피지배자의 종교로 출발하였다. 기독교의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지배자의 종교로 변형된 점이 없지 않다. 엥겔스는 적어도 초기 기독교의 오순절 공동체와 16세기의 토마스 뮌처의 농민운동과 재세례파의 정치적 항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레닌도 가난한 자의 편에선 사도들의 예언자적 기독교와 기득권 편에 선 콘스탄틴 이후의 국가적 기독교를 구분하였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를 진정한 기독교하고 주장한다.

또한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민중을 고난에서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전투적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해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는 작용을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도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초기 기독교처럼 종교가 사회적 변화의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종교가 지배자들의 거짓된 이데올로기라는 명분하에 무신론을 주장한 근거는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의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이나 제3세계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지배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허위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 비판에 입각한 무신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며 사회주의를 달성의 궁극적인 목표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3) 과학적 무신론

마르크스는 당시의 새로운 과학으로 떠오른 초기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과학과 동일시한 반면, 종교는 세계에 대한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관점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엥겔스(1820-1895)는 '자연변증법' 서문에서 뉴턴, 데카르트, 케플러에 이르는 현대과학은 종교적 권위에 벗어나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의 역사를 선도하였고, 신학으로부터 자연과학의 해방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새로운 과학으로 인해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 설명은 극복되고 과학의 기초에는 모든 현상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리 잡게 된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의 사람으로서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종교와 과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진정한 과학자들은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학이 우주와 인간에 대한 모든 질문에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단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 가설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여길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설은 새로운 가설에 의해 뒤집어 질 수 있는 한시적 가설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따라서 과학적 진리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미신’이라고 규정된다. 그리고 종교적인 가르침이 미신이고 비과학적이라는 명제도 더 이상 타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과학과 종교는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지동설과 진화론이 등장하였을 때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새로운 과학의 등장으로 종교의 지위가 흔들릴 것으로 우려하였으나 현대에 와서 많은 종교인들은 인간의 종교적인 신앙의 기초는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이행을 불변의 과학적 원리로 내세웠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 때문에 소멸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자연과학의 원리처럼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믿었으나 동구권의 붕괴로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을 잃었다. 세계사의 흐름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국가가 붕괴되어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유물론적 공산주의를 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무신론은 그 근거와 기반이 취약해진 것이 분명하다. 현대에 와서는 그 누구도 19세기의 천박한 과학관과 유물론적 변증법을 내세워 무신론을 주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의 이름으로 무신론을 계속 관철 할 수 있는 명분이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전투적 무신론

청년 마르크스는 모든 비판의 전제로서 종교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서에는 종교를 타파하거나 종교를 대항하여 투쟁할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엥겔스 역시 종교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전략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무신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급진적 블랑키주의자와 바쿠닌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법률로 신을 부정하려는 욕구는 비생산적이고 종교적 박해는 바람직하지 못한 신념을 조성시킬 뿐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적대적이고 전투적인 무신론을 편 것은 공산주의 혁명 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이를 진두지휘를 한 레닌이다. 그는 1913년 고리끼(Maxim Gorki)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신 이념은 가장 위험스러운 것, 혐오할만한 것, 가장 적대적인 전염병이다. … 신이란 특히 이념들의 복합체이며, 이 이념들은 자연을 통하여 계급억압을 통하여 결과된 것이고, 인간 억압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며, 이러한 억압을 영속적인 현상으로 만드는 계급투쟁을 잠재우는 이념의 복합체이다."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7일 권력을 장악한 후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포함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출생, 결혼, 사망에 관한 법률을 교회와 무관한 사법관의 이름으로 통과시켰다. 1918년 1월 23일 발포한 법령에는 “모든 인민은 어떠한 종교적 믿음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전혀 가지지 않을 수 도 있다. 또한 종교의식도 자유롭게 허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의식이 공공질서를 방해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성직자의 공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도 공산화 초기에는 종교를 적대적 세력으로 몰아 탄압하였다.  북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역시 공산집권 초기부터 ‘종교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도구’라고 여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1948. 9. 9)에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의 자유를 가진다”(제2장 14조)고 명시하였으나 1972년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제4장 54조)라고 수정하였지만,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포함시킴으로써 종교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8.15 해방 전까지 북한에는 교회가 2600여개나 있고 금강산 등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이 많았다. 평양의 교회 수만 270여개였다.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부를 정도로 기독교가 왕성한 도시였다. 1950년 남북 간의 전쟁이후 북조선에서 교회당은 소멸하고 가정교회만이 존재해 왔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20년간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의 정책을 시행하여 오다가 1972년 2월 미국과 중국의 수교에 이어 일본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지는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서해빙의 무드를 타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유명무실하였던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중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이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북한의 개신교, 천주교, 불교 관계자들이 제3국을 통한 남북 종교인 교류를 이어 왔으며, 특히 1981년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는 이후의 남북 기독교인들의 회합과 통일을 위한 논의의 물꼬를 터 주었다. 이러한 변화되어 가는 남북 정세를 반영하듯이 1982년 발표된 김일성의 종교관은 북한이 반종교 정책을 쓰던 시기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적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을 배격하시었지 종교와 종교 신자를 배척하신 일이 없습니다. 종교에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1988년 11월에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 처음으로 봉수교회가 세워졌고, 1988년 9월에는 천주의 장충성당이 세워지고, 1992년 12월에는 칠골 교회가 준공되었다. 북한의 조선기독교연맹은 신약성서(1983)와 구약성서(1984)를 발간했으며, 1990년에는 신구약합본 성경과 음표가 있는 찬송가를 1만부씩 인쇄하기도 하였다. 1990년 1학기에는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안에 종교학과가 개설되기도 하였으며 재미교포 홍동근 교수가 기독교학을 강의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1992년 4월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종교에 관한 규정(제5장 68조)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는데 1972년의 ‘반종교 선전의 자유’라는 내용을 삭제하는 ‘외세 금지와 국가질서 유지’ 항목이 새로 포함되었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건물을 짖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질서를 헤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헌법 개정과 아울러 종교와 관련된 낱말 풀이가 크게 친 종교 쪽으로 바뀌었다. 1981년 판 '현대조선말 사전'과 1992년 판 '조선말대사전'의 풀이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사례를 도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관련 용어 변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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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에 등록된 기독교인 수는 1만2000명이며 공식 교회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2곳이다. 소규모 가정예배처가 520여 곳 있다.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도 있으며 조그련에 현재 30여명의 목사 등 교역자 300여명이 활동 중이다. 북측에서는 교인 수를 1만4000여명까지 늘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등 일종의 ‘만사운동’도 펼치고 있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1990년을 전후하여 북한 뿐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금은 공산혁명 초기의 전투적인 상황에서 종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무신론을 주장하던 상황에서 급변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국에서도 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에 전투적 무신론은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은 체험적 반공주의자들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맥거번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휴머니즘적 무신론과 이데올로기적 무신론과, 과학적 무신론과, 전투적 무신론을 주장한 이유를 분석한 후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무신론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무신론이 이론적으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신앙을 가진 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다”고 하였다. 마르크스의 무신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적 이론의 결론 일 수 없고 오히려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기 위한 요청된 것이다. 골비쳐는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무신론은 ‘본질적 무신론’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요청되는 ‘요청적 무신론’이라고 하였다. 박순경은 “오늘날 분단된 세계 상황의 주된 원인은 공산주의 무신론이 아니라 세계패권의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원칙적 반공주의의 극복 과제

자본주의가 일류 역사가 이룬 최상의 이념이요 제도라고 하지만 자본주의가 절대선은 아닌 것이다. 영국의 ‘비비시’(BBC) 방송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을 맞아 27개국의 2만9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거의 80%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27개국 중에서 22개국의 67%가 “정부가 나서서 부를 더욱 평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신학자, 경제학자, 윤리학자, 교회 지도자 그리고 기업가들이 “기독 신앙과 경제학에 관한 옥스퍼드 선언”(1990)을 발표하였는데 성경에는 어느 특정한 기독교적 경제관을 직접 제시한 바 없지만, “ ‘이기적 개인주의와 ‘경직된 집산주의’는 모두 인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두 이념이 구현”되어 있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성경적 경제관에 입각한 체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적 경제관에 따르는 경제체제는 “부를 정당하게 생산하는 능력과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능력이 동시에 고려”하는 제3의 길을 제시 하였다.

바르트는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절대선이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자본은 인간의 이기심에 호소하여 서로 투쟁하게 만들며, 고용자나 피고용자나 모두가 자본을 섬김으로써 인간성은 위협받고 조롱받으며 모두를 소외시키고 물화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통해 자본의 억압과 착취가 없이 모든 사람들이 연대감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만약 공산주의 국가가 복음 선포를 허락하고 교회의 모임을 허용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국가 보다 나을 수 있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저 유명한 '로마서 강해'(1919)를 저술하여 자본주의와 같은 현존질서를 긍정하는 ‘악에게 지는 것’이고, 현존질서가 악하다고 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혁명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혁명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혁명은 모든 인간적 혁명보다 더 철저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인간적인 혁명에 내재해 있는 악들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마서 강해' 초판의 로마서 13장 강해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강조한 것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통해 주장한 영구혁명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 평가된다.

칼 바르트는 2차 대전 후 전 세계가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과 미국을 대표하는 자본주의 세력이라는 두 개의 강대세력권에 편입되는 것을 불가피한 일류사의 과정으로 보았다. 공산주의는 서구의 초기 자본주의의 열악함과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시도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공산주의는 서구적 발전의 - 호전성 때문에 비록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 필연적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이 양자 세력 사이에 있는 교회는 어떤 편을 들어야 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공산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도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어느 편에도 설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 안에서 두 체제의 대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제시하며, 그러기에 이 두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비판하고 더 높은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는 가치로 양자를 지양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

바르트는 교회는 상황에 따라 보수적일 수 있고 진보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어느 하나의 정치적 ‘노선’에 원칙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냉전시대에 양대 세력이 서로에게 적대적 원수 관계를 부추기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 교회가 취하여야 할 제3의 길이라고 하였다. 극단적인 대립을 조장하는 원칙적 공산주의나 원칙적 반공주의는 모두 나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적대감을 부추기는 “원칙적 반공주의는 공산주의 그 자체보다 더 큰 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듯이, 원칙적인 반공주의자, 즉 자본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 속에 있는 히틀러’만이 원칙적 반공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었는가?”라고 반문한다.

바르트는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를 구분하였다. 마치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공산주의는 미워하되 공산주의자들을 위하여하며 그것이 공산주의를 대항하는 길이이라고 역설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항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다. 공산주의자들도 인간이다.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들도 위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을 위한다는 것이 공산주의를 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위하는 그 때에만 공산주의에 대항하여서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원수 사랑의 정신과 화해의 정신을 가지고 공산주의를 대할 때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이고 궁극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에 ‘원칙적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체 보다도 나쁜 것’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체험적 반공주의의 치유와 화해의 신학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유난히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역사적인 원인이 있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해방직후만 해도 한국교회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양 이데올로기에 대해 보다 탄력적이고 포용적이었으며, 당시 북한교회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사회민주당 운동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들이 종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였고 반면에 일제 통치의 악영향으로 종말론적이고 전투적이 되어버린 교회는 이러한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융통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하여졌다. 이처럼 “북한의 김일성 공산 독재 체제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기독교 박해 정책 아래서 한국기독교인이 겪은 체험과 6.25사변을 통해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에 가한 적대의식의 체험”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 일변도로 경직하여 버렸고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매몰시키고만 것이다.

"해방 후 한반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험장이요 각축장이 되어 왔다. 그 실험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한반도 남쪽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특이하다. 이 특별한 체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식함과 잔학함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직접 겪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분단과 그리고 6.25전쟁은 남북 상방에게 엄청난 상처와 적개심을 안겨 준 ‘민족적 트라우마’이다. 따라서 1989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6.25에 의한 개인적인 피해유무를 질문한 결과, 전체의 53.1%가 개인적 피해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의 내용으로는 ‘경제적 파탄’ 38.3%, ‘가족의 사망/부상’ 21.2%, ‘이산가족/실향’ 16.5%, ‘배울 기회의 상실’ 12.3%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 전쟁에서 남한과 북한 가운데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라는 극히 상식적인 질문조차 던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모든 전쟁은 상방이 피해를 입기 마련이며 6 .25전쟁의 경우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였지만 결국 북한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그러나 1989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남한 주민들의 피해의식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6. 25전쟁으로 남북한 어느 쪽이 더 커다란 피해를 입었는가에 라는 질문에 남한의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는 응답이 72.2%인 반면, 북한 쪽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는 응답은 5.8%에 불과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남북한 가운데 “어느 쪽의 피해가 더 컸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74.4%가 남한의 피해가 더 컸다고 대답했고 3.4%만이 북한의 피해가 더 컸다고 응답했다. 21.9%는 남북의 피해가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실제로는 남한보다 북한의 인명 및 재산의 피해가 더 극심하였다. 통계적으로 사상자 수를 단순 비교해 보아도 북측의 인명 피해가 남측 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북한의 인구가 남한의 절반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피해는 실제로 네 배 가까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 남한 측 인명피해
한국군: 998,341명(사망 237,686명, 부상 717,083명, 행방불명 43,572)
남한민간인: 1,161,343명(학살 129,936명, 사망 244,663명, 납치 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의용군 400,000명)
미군: 136,992명(사망 33,629명, 부상 103,284명, 행방불명 9명)
유엔군: 15,200명(사망 3,143명, 부상 11,532명, 행방불명 525명)

- 북한 측 인명피해
조선 인민군: 사상자 520,000명
북한민간인: 사상자 2,728,000명
중국 인민군: 사상자 900,000명

경제적 피해도 막심하였다. 3년 동안의 전쟁비용으로 유엔군 측은 300억 달러, 공산측은 150억 달러를 투입했다. 남한의 전쟁 피해액은 4,123억 환으로서 일반 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다. 북한의 재산피해액은 4,200억 원이었으며 공업생산은 50%로 줄었으며 농업부분의 피해가 훨씬 컸다. 이처럼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 및 가옥의 피해도 북한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다.

6. 25전쟁 동안 전투 과정에서 피차 희생된 군인 외에도 북한이 잠시 점령한 서울에서는 반동분자들이 무작위로 무수히 처형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역으로 공산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이 무작위로 무수히 처형되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피학살 민간인과 불의의 죽음을 당한 말단 병사들, 전쟁의 와중에서 다치고 상처 받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미군과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전쟁의 최대 비극이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대부분의 학살은 미군과 한국군 등 공권력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고, 전쟁 중에 일어난 사적 보복의 양상을 지니는 학살의 경우도 전쟁이라는 정치적 환경과 정치권력, 경찰과 군의 실질적인 묵인 하에 이루어 졌다.

위딩톤(E. Worthington)은 치유와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상처를 객관적으로 수용하고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6. 25 전쟁의 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후 동서냉전체제라는 국제정치질서의  구조적인 죄악의 결과로  그 대리전의 형태로 6. 25전쟁이 일어났으며 남북은 모두 이러한  이념대결의 각축장의 희생양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노이로제가 치유되듯 6. 25 전쟁은 북한의 일방적인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이 모두 미소 대립의 냉전체제의 희생자였다는 객관적 역사 인식에 이르게 되어야  전쟁이 가져다 준 개인적인 체험의 고통과 한과 적개심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쟁과 피난으로 인한 상처를 입었지만, 북한 주민들이 더 많은 피해와 상처를 입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수용하여야 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이 당한 고통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북한이 당한 고통이 더 컸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하여야만 피해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고통을 객관화하고 역사화 하여 치유와 용서와 화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나 탈냉전시대에 접어들고 공산주의 이념마저 퇴색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동안의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을 치유하고 용서하지 못한 채 여전히 반북, 반공, 반통일을 부추기는 설교하고 목회자들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정용섭은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임상치료가 필요한 대목이다”고 하였다.

정성한은 공산주의에 의한 고통스러운 개인적인 체험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에 대한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손양원 목사는 ‘개인적 경험’이 공동체의 경험을 앞서간 대표적 사례이고, 한경직 목사는 그 반대의 사례라는 분석이다.
 
"손양원은 그의 보수적 신학과 철저한 반공의식에도 불구하고 분단 상황과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상당히 과학성을 확보하고 있던 당시 좌익의 인식과 많은 부분일치 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측면을 역사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보편적 영성’을 확보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를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전 백성의 보편성’의 시원을 열었다. … 그러나 한경직은 그의 신학의 상대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반공의식’에 기초한 세속사 인식으로 ‘반공투쟁’을 주도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두 아들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체험을 분단 극복의 미래지향적인 통일의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체험’은 그 시대의 보편적 역사적 체험의 비추어 미래지향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 때 그 개인적인 체험이 극복될 뿐만 아니라 그 개인적 체험이 역사적 보편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한 것을 설교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순경의 지적처럼 더 이상은 “북한에서의 기독교인들의 고난에 대한 보도와 회고는 적개심을 자아내게 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개인적 상처들을 객관화하고 체험적 반공주의의 민족적 정신적 외상(trauma)에 벗어나 미래를 위해 화해와 통일을 위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의 희년선언(1995)에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 설 것을 역설하였다.

"인도주의 원칙을 선언한 교회는 화해와 공생과 교류협력의 시대에 무엇보다 분단과 대결로 인해 빚어진 인간적인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일그러지고 마비된 민족구성원들의 인도적 삶을 회복시키는데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희년의 정신이 고통당하며 소외된 자를 돌보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데 있다면, 분단의 희생자들인 이산가족, 사상범과 장기수, 국가보안법과 이에 상응하는 법들의 피해자와 피납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며, 상처를 치유하는데 교회가 앞장서 노력해야 한다."

쥬디스 허만(Judith L. Herman)은 전쟁을 포함한 각종 폭력으로 인한 상처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회복하는 데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첫째는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상적인 삶과 재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이러한 분단의 상처를 치료하고 동시의 공존의 체험을 할 수 잇도록 치료의 3단계를 제공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만남과 공존을 실험하는 공간, 전환적 공간을 제공하여야 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한의 신학을 통해 맺혀있는 원한과 풀어가는 정한을 구분하고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민중의 한을 줄어 준 ‘한의 사제’라고 하였다. 한국교회가 전쟁의 상처를 들추어내어 상처를 돋우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체험적 반공주의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좌우를 아우르는 대안

예수는 공산주의자일까? 자본주의자일까?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가까울까? 자본주의에 가까울까? 예수는 생산의 효율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달란트의 비유(마 25:14, 30)와 포도원 지기의 비유(막 12:1, 12)의 공통된 사상은 물질을 매개로 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설정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위탁받은 관리자인 인간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늘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1, 9)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그가 창조하신 좋은 땅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달란트의 비유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라고 하였으므로 생산의 효율성과 재산의 증식과 부의 창출과 경제성장을 강조한 자본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눅 4:19)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였으며 부자청년에게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하였으니 자본의 축적 보다 분배를 강조한 공산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오순절 교회가 유무상통을 실천하여 원시공산주의 형태를 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오병이어(막 6:35-44)의 이야기에서 예수가 자본주의자였다면 각자의 먹거리는 각자가 해결하라고, 있는 사람은 먹고 없는 사람은 굶어야지 별 수 있느냐고 했을 것이다. 예수가 공산주의자였다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가진 것을 강탈하여 공평하게 나눠먹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6:37)고 하셨다. 가진 것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함께 나누어 먹자고 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기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요된 이타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자발적 이타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좌우를 아우르는 기독교의 경제적 이상인 것이다. 각자가 현재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는 데에서 모두가 잘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가르친 것이다. 최근 전 재산의 절반 기부운동을 펼치는 빌 게이츠는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잘 사는 사람만 더 잘 사는’ 우파적인 자본주의나, ‘모두가 못사는’ 사회 좌파적인 공산주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양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제3의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좌우를 아우르는 몸통이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날듯이 좌우가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좌우 날개를 가진 몸통’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사이에도 좌우 이념논쟁으로 큰 갈등을 겪었으나 다행히도 조소앙이 제안한 좌우를 아우르는 삼균주의를 수용하여 ‘대한민국건국강령’(1941. 10. 28)을 제정, 공포했다. ‘정치의 균등’(참정권), ‘경제의 균등’(수익권), ‘교육의 균등’(수학권)을 내세운 삼균주의는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이었을 뿐 아니라 해방 정국에서도 좌우합작의 통일 이념으로 제시되었으므로 잊혀져가는 좌우합작의 삼균주의를 미래지향적 남북통일의 이념적 대안으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평화와 희년의 통일선언(1995년)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분단된 조국에 사는 우리는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제 3의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남북의 이념과 체제를 아우르고  양쪽을 서로 살리는 ‘함께 사는 공생적 통일’,  남북의 장점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단점은 지양하고 극복해서 서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서로 배우며 닮는 수렴적 통일’,  새로운 가치와 문화, 새로운 사회 구조와 공동체를 창출해 내는 ‘새롭게 만드는 창조적 통일’을 지향할 것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앞장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을 통일 이후의 과제로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여전히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는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원칙적 반공주의요 체험적 반공주의이다. 그러나 원칙적 반공주의는 균형 잡힌 의식을 통해 교정되고 6. 25전쟁을 통해 형성된 민족적 트라우마와 체험적인 반공주의의 적대감은 죄책의 고백과 용서의 간구와 화해의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남북이 평화 통일을 하려면 남북이 더욱 친해져야 하는데 친북인사를 오히려 매도하고, 남북 간에 3통(통상, 통행, 통신)을 통한 소통과 통합이 활발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북 교류를 봉쇄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처럼 반공이데올로기의 극복에 앞장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허호익 교수 (대전신학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