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h.jpg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속히 오시고 싶어 하신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주님이 지체하지 않고 빠른 시간에 이 땅에 다시 오시고 싶어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신랑과 신부의 비유인 마태복음 25장의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도 시간적으로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날 밤에 오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0년동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 서 살아 왔다. 특별히 고난 중에 있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얼마나 기다림으로 가득차있었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심이 멀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분은 오신다. 아주 속히 오신다!

하나님의 선교의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비와 친척을 떠나 갈 곳을 몰랐지만 자진하여 떠나는 아브라함은 이방인 속에서 비자발성 선교사로 그 땅에 심겨졌다. 모세를 애굽 땅에서 자라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출애굽을 시킴으로 애굽에 여호와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바벨론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지서 가운데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롬16;25). 다윗의 시편 가운데에도 이방인의 영광을 받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볼수 있다. 요나서는 구약의 39권의 성경 중에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비전을 보여 주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요나서와 계시록에 나타난 아버지의 마음

요나서에 주님은 니느웨성이 40일이면 멸당된다고 요나를 그 땅에 보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듣지 않고 도망가는 요나를 다시 돌이켜 니느웨 성으로 가게 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게 된다. 단 한명이라도 멸망받기를 원하시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동안 모든 성경의 예언들이 이루어졌다. 이제 한가지 남은 예언인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모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고 싶은 사랑에서 근거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길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 주님은 여전히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선교적 기도문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메시아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도하게 하셨다. 주기도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하는 기도이다. 유대인의 세계관에서 우주적인 세계관으로 바꾸게 하는 하는 기도이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죄를’ 등등의 표현은 개인적인 차원의 기도가 아닌 선교 공동체적인 기도임을 깨닫게 한다.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존 파이퍼는 “선교가 교회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교회의 궁극적 목적이며, 진정한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땅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의 삶은 이 땅에 정함을 두지 않고 천국을 전파하는데 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는 선교의 종말을 암시한다. 이 땅에서는 시험이 끝날 수가 없다. 이 시험이 끝나는 날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이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권세만이 존재한다.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가 올 때 선교가 완결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 오는 날이다. 주기도문이야 말로 선교적 기도이다.

선교는 긴박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곳곳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 “40일이면 니느웨는 망한다.”.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이르리라.”  등등의 말씀으로 종말이 가까이 옴을 예언하고 있다. 지구 구석구석에 마태복음 24장의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다.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이 시작되었으며 처처에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징조들이 암시적으로 보여 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그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통해 “깨어있으라.”의 의미를 깨닫는 자는 자발적으로 거룩한 신부의 자세로 주님을 기다린다. 이 거룩한 신부의 무리들이 전 세계에 일어나야 한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며 선교적 재림을 암시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눅 22;14-20, 고전 11:26) 복음이 전파되면 속히 오시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비전 (계22:7, 22:12, 22:20)과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하는 성령님의 비전(행2:21)을 이루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선교의 목적은 모든 민족, 각 나라, 종족, 백성과 방언에서 어린양을 찬양케 함(계7:9-12) 에 있으며 모든 민족으로 여호와를 찬양케 함(시67편)에 있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아래 꿇게 하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함(빌2:10-11)에 있다. 즉 선교의 목적은 전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의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홀로 영광받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