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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동무'란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고 동심의 문이 열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인터넷에 '친구'라는 검색어를 치면 "친구를 잘 사귀는 법" "난 왜 친구가 없을까?"와 같이 부정적인 글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라는 단어는 마음이 아닌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벗, 동무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즐겨 외치던 "친구야 놀자"란 말은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도 학원에 가야 하는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낯설고,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말이 되어 버렸다.

친구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친구란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을 말한다. 사적인 시간을 함께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하루의 일과를 보내는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인연이고 의미가 있다. 스페인 작가 그라시안은 "친구를 갖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친구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극악무도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행하고 있다. 함부로 비판하고 신체적 가해를 하며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표출하는 대상으로 삼아도 친구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교활한 인간들이 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100세 시대!' 우리는 나날이 발전되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잔인한 피해를 본 사례가 전해지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이 두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왕따로 고통받고 폭력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그 책임을 개인들에게 묻고 있다. 심지어 피해자의 인격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어서 당한 것이라며 왕따와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우리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우리 헌법이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한 규정이며, 인간 고유의 가치를 헌법에 규정함으로써 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존엄한가? 인간다움을 잃은 사람들까지 존엄하다고 말하기에는 도덕성의 기준이 흔들린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주어지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성의 보장은 고립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제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존엄성이 훼손된 사람들과 그 관계들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의 보호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의 작은 관심을 모아 인간 존엄성 보장을 위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길 원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존재는 인간이다. 과학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인간성, 도덕성 함양을 위한 사회적 제도가 함께 공존해야 할 것이다.

g2.jpg오늘부터는 내가 먼저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손을 내밀어 보자.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김춘추의 시 "꽃"을 읊어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임혜숙 박사

왕따없는세상운동본부 교육이사(http://outcast.or.kr)
세계한인재단 차세대위원회 문화예술위원장
서울대 음악교육학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