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신학은 세계적 수준의 신학이지만 아직까지 정립이 되지 않은 신학이 있다면 성령론이다. 왜냐하면 성령론에 대한 신학사상이 다양하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자들과 은사를 전혀 체험하지 못한 자들의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도 받는 은사부터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셔서 각자의 문화와 다양한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은사를 받는 사람이 이해하도록 주신다. 이 때문에 타인에게는 생소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어 이론적으로 단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립되지 않은 성령론 때문에 다양한 신학적 이론과 체험적 이론으로 영적 혼란에 빠지기도 하며, 바른 성령의 은사 사역도 신비주의나 이단으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며, 세상 끝날까지 구원받은 자 안에서와 역사의 주권자로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바른 성령사역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성경말씀과 인격과 열매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성경사본에는 은사를 받지 못한 자를 무식(無識)한 자로 기록된 곳도 있다. 서로 이해가 안 되므로 해석상의 문제로 오해를 낳고, 신비주의나 이단으로 규정하는 사례가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성령은사가 나타난 지 28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전서가 쓰이면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현재의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은사 사역은 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로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상황에 따라 오순절 때 나타났던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례도 종종 보인다.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이 사라졌다거나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과 이성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믿음도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엡 2:8)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은사적 믿음이 있으며(고전 12:9), 예언도 성경말씀을 기록한 계시적 예언은 계 22장 18절에서 종결되었지만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적 예언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을 성경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극보수주의의 잘못된 이해와 적응의 신학이론 때문에 신학과 목회의 괴리가 있어 성령의 은사 사역자들을 신비주의나 이단으로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신앙 자체는 신비다. 신비가 빠지면 신앙이 아니다. 개인이 받은 신비적 체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오류를 범하여 신비주의에 빠진 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사도운동과 그것 때문에 방언에 대한 성경말씀을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학에 근거하여 계속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부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지 않아 성령의 은사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또한 은사를 받을만한 영적인 기도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가 이성과 지성과 종교성으로 목사도 되고 신학자가 된 것일 수도 있으며, 가족 중에 불치의 병이나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절박한 환경을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요, 절박한 환경을 경험했어도 하나님의 능력보다 과학적인 의학에 의존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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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기도금식성회 모습(사진은 기고 내용과 직접 연관이 없습니다.) ⓒ국가기도연합 제공
구원은 성령의 은혜로 거듭남으로부터 얻는다.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 전능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을 만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거듭나 구원받은 자 누구에게든지 성령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다.(고전 12:11)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바른 신앙생활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키시는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제자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능력의 도구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목회자가 기도나 전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자들이며 교회의 봉사도 솔선하는 분들이다.
일부 신학자들에게는 다음의 오류가 있다. 성령의 28가지 은사 중에 다른 은사는 아무런 말이 없으면서 방언과 예언 은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레르기를 가지며 거부하고 비판하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거부하며 이성과 지성으로 인본주의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시점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신학 개혁, 목회자 개혁, 교회 개혁의 대안이 나올 줄 기대했으나 루터와 같이 용기를 가지고 개혁을 내놓는 신학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개혁다운 개혁안을 제안하면 교수의 자리를 잃게 되거나 비판의 이론과 언론을 감내하기가 500년 전 루터의 시대적 상황보다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계의 생태계와 교권과 권위주의의 벽을 넘기가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요, 가족이 있어서 용기를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나 여겨진다.
현직에 있는 신학자들이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은퇴하신 신학자 중 양심선언으로 신학과 목회자와 교회의 개혁을 위한 대안을 적나라하게 내어놓는 원로 신학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 상태로 그냥 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계속 교인 수가 감소하고 문을 닫는 교회가 더 속출할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핵폭탄 같은 강력한 막대기로 치실까 두렵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범하는 죄의 기준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의 범죄가 지역과 국가의 심판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성해야 한다.
유럽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조건이 있겠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18세기에 자유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신학이 범람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의 사회성이 되었고 세속화되어 영성을 잃어버렸다. 한국교회의 극단적 진보 쪽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으로 나가면서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단계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단계까지 갔다. 극단의 보수주의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은사사역을 하면 신비주의니 이단으로 매도하여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양쪽 모두 성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키려는 은혜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빼앗아 명목적인 교인이 되도록 하거나, 교회를 떠난 ‘가나안 교인’을 만들기도 하는데 장로교단의 교인들이 제일 많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통계자료에서 볼 수 있다.
각 교단의 신학위원회와 신학교 교수들이 먼저 한국의 기독교 현실과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같은 교권과 권위와 명예를 철저히 내려놓고 성경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는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목회자들의 설교와 신학강의에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신 18:22), 거짓이요, 위선이요, 짝퉁이다.
b2.jpg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 기독교의 개혁이다. 이를 위해 지도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의 조명을 선명하게 구체적으로 받는 단계에까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또 지도자들이 갈멜산의 엘리야와 같은 기도로 세상적 가치관에서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변화되는 값을 지불하여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님만 보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굴복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 개혁이며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부산세계선교협의회 대표 박수웅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