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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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째 전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으로 지목된 북한에서 지하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그가 만난 예수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예수를 전하기 위해 북한에서 10곳이 넘는 감옥을 전전하면서도 믿음을 지켜낸 탈북인 목사의 간증을 소개한다. 한국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전도자이자 순교자인 김익두 목사의 손자며느리인 박한나 목사는 최근 방주교회에서 열린 2018 오픈도어 후원의 밤에서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눴다.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로 얻은 자유

할렐루야! 세상에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잘난 데가 있어서 여기 서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그 기적으로 이 영광의 자리에 저를 세우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너무나 크고 놀랍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할 때, 마음에 상처 있고 가정의 문제가 있는 성도들, 육신의 고통받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셔서 다 창조의 모습대로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를 본문으로,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눠볼까 합니다.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들께 늘 감사하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자유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길거리에서 찬양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사람도 없고, 예배드린다고 잡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자유가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 이런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고,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저는 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만 리가 넘는 가시덤불 길을 헤매야 했고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두 번 탈북했다가 두 번 북송되었고, 크고 작은 감옥을 비롯해 열 군데도 넘게 갔습니다. 여기(한국)서 교도소 사역을 한 것도, 제가 감옥에 있을 때 한국에 가면 꼭 교도소 사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에게 ‘비록 육신은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 처벌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몇 년 동안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1년이 채 안 되어 다른 목사님과 함께 전국 교도소들을 거의 1년 동안 다녔고, 사임하며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인들인데 머리도 깎지 않고,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고, 예배드리면서 마음대로 쓰고, 또 마음대로 악기를 다루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감옥에서 하나님을 몰래 찬양하다가 들켜서 두드려 맞고, 벌도 받았고, 정말 그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전쟁 과부들에게 몰래 복음을 전하던 어머니

저희 가정에 대해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추려서 몇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5~6살 때 밤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저희 어머니가 무엇인가 손에다 쥐고 목에 흰 사슬을 걸고, 눈물 흘리면서 자꾸 중얼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우는지, 왜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탈북하고 교회를 갔을 때 자매님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단 것을 보고 ‘엄마가 목에 건 것이 저것이었구나’ 알고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땅(북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와 선교사는 양의 탈을 쓴 승냥이들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었다가는 온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정치범수용소에 깊은 밤 1시, 2시, 소리 없이 차로 실어 잡아가고, 그들은 간첩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 “절대로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온 식구, 친척들까지 죽으니 일생 동안 돌아가실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과부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고, 어머니가 들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그들에게 말씀한 것은,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같이 말했다가 돌아서면 남한테 전해진다. 그렇게 울고 싶고 안타까울 때는 하늘에다 대고 하소연하고 울어라. 하늘은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마음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린 마음에 학교를 가고 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도 거리가 멀면 안 들리는데 저 하늘에 누가 있길래 땅에서 말하면 우리말을 다 들을까. 거기서도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채소도 있을까’ 하며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제가 탈북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야 이 세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망하시는 그날까지도 제게 예수님을 전하고 가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90년도 위암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학교에 갔다 오면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다가 생뚱맞게 딴말로 돌려치기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나한테 저렇게 나가 놀라고 내쫓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할 때 어머니가 그 불쌍한 과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7살 때 할아버지 김익두 목사 순교 목격한 남편

그리고 저의 남편은 김익두 목사님의 손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키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1950년 10월 14일 신천서부교회에서 새벽 기도시간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쫓겨가는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남편은 7살 나이에 할아버지가 순교 당하는 것을 보았고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목사라 하면 나도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해 친한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할아버지가 순교자라는 말을 못 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부부 간에도 자식 간에도 당의 사상에 틀린 것, 어긋난 것은 다 신고하라, 신고하면 용서해준다고 하니 가족 간에도 불신이 있고 눈치 보고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자라왔습니다.

남편도 가족에게 몇십 년 숨기고 있다가, 탈북 후 중국 조선족교회에서 이야기를 듣는 중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생각나 “우리 할아버지도 목사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할아버지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나요?”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김익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 교회 장로님들이 이야기해주셔서 제가 알게 됐습니다. 오늘 제가 영광의 자리 서게 된 것도 김익두 목사님과 보위부에서 고통받는데도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저의 남편과 저의 어머니 기도가 있었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어머니의 기도가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항상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