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부모님은 아주 신앙심이 깊은 장로, 권사님이셨습니다. 두 분은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고향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면 소재 교회를 섬기시다가, 사재를 팔아 동네에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부모님은 150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세 번째 가는 자산가셨습니다. 아버님은 가까운 동산에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올라가셔서, 나무 아래에 마련한 기도처에서 기도의 정성을 쌓으셨습니다.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은 철이든 제게 “여긴 네 아버지가 새벽마다 기도한 자리”라고 알려주시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9남매를 낳았는데, 큰 누님(75세)과 저, 막내 남동생(51세) 3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모두 어릴 때 이유도 모른 채 잃거나 홍역에 걸리거나, 사고로 일찍 떠나 보냈습니다. 구순열(태어나면서부터 입술이 갈라져 있는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저는 자녀가 귀한 저희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여러 자녀를 앞서 떠나 보낸 어머니는 누가 보기에도 시원찮게 태어난 저를 보시고 3일 동안 우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3일이 지나도록 숨이 붙어 있어 자꾸 먹을 것을 달라 하는 아기를 보고 어머니는 ‘살라는가 보다’며 우유를 주었다고 합니다.

“교회도 신앙도 다 필요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 왜 저를 이렇게 낳으셨나요?”

남들과 달리 갈라진 입술로 인한 기이한 외모, 웬만한 사람은 알아듣기 힘든 어눌한 발음 때문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와 동네 어르신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집에 놀러 오신 아버님 친구들까지 제 말투를 흉내 내면서 농담 삼아 우스갯소리를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저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구순열로 태어나면 생후 3~6개월 차에 1차로 봉합 수술을 하고 추가 수술을 통해 흉터도 거의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부모님도, 저도 구순열 수술을 하면 개선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졸업 후 10대 중반이 되어서야 서울에서 1차 수술을 받고, 이후 영주에서 2차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외모나 발음이 많이 좋아졌지만, 수술 전에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 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분노와 원망을 마음속에 쌓아가며 저는 자신을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세상 밖으로 나오길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중학교에 진학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저는 초등학교 졸업 후 스스로를 학교에 못 다니게 했습니다.

kimhongseoub1.jpg신앙 좋은 부모님께서는 저를 위해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셨지만, 그 모습조차 싫었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시는 부모님에게 왜 나 같은 불구자가 나올까”라며 자책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오늘날 받은 넘치는 축복은 밀알을 쌓는 것처럼 저를 위해 하루도 빠짐 없이 눈물로 기도하신 부모님 덕분입니다.

반항하는 저를 안타깝게 여기고, 당신께서 가진 모든 것으로 사랑을 베푸신 부모님은 제게 “너는 커서 일은 안 해도 좋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바로 아래 남동생은 가장 큰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생은 잘생긴 외모에 공부도 잘하고, 오르간도 곧잘 쳐서 학교 선생님에게 자주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했나요.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의 자랑이요, 동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동생은 하굣길에 뱀에 물려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계속>

김홍섭 3G테크놀러지 사내 협력업체 성창공업 대표(64세)